작은아이가 수학 예비시험에서 터무니없이 낮은 점수를 받았다며,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스쿨버스 안에서 문자를 보냈다. 집에 와서 이야기해도 될 일인데, 충격이 컸던지 연습문제를 찾아 준비해 달라며 도와달라고 했다.
나도 중학교 수학을 미국에서 배우지 않아 용어가 낯설지만, 어떻게든 도와야 하니 부랴부랴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아이가 예전부터 친구들처럼 튜터를 받고 싶다고 했지만 재정상의 이유도 있고, 중학교 공부에 과도한 열심은 too much인 것 같아 “모르면 엄마가 도와줄게”라고 약속했었다. 약속했으니 책임을 져야지.
함께 연습문제를 풀다 보니 아이의 표정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조금은 자신감을 되찾았나?’ 싶을 즈음, 남편이 저녁이 준비됐다고 불렀다. 아빠가 준비한 삼겹살로 맛있게 저녁을 먹고, 아이들과 식탁을 정리한 뒤 설거지거리를 식기세척기에 넣었다. 그러자 작은아이가 디저트로 크레페를 만들고 싶다며 다시 도와달라고 했다. 오늘 가족에 대한 의무는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아니군. 사실 저녁 먹고 이번 주 박사 수업 reading assignment를 부지런히 해야 했는데, 어쩌겠는가. 적어도 지금 느낌은 내 공부보다는 아이와 크레페 만드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판단이 섰다.
작은아이와 from scratch 크레페 반죽을 섞고 굽는 과정을 함께 했다. 시간이 꽤 걸렸지만, 언젠가 이 순간이 아이가 인생의 어려움을 겪을 때 힘이 되어 줄 기억으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몇 장은 내가 구워서 보여주고, 나머지는 아이에게 맡겼는데 제법 그럴싸했다. 마지막 마무리는 혼자 할 수 있을 것 같아 청소까지 맡기고, 나는 공부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아이가 다 구운 크레페를 들고 와 자랑스럽게 보여준다. 이어 형과 함께 각자 원하는 토핑을 올려 크레페를 만들어 먹었다. 자신이 원하는 디저트를 만들어 누군가와 나눌 줄 아는 법을 가르치는 일은, 어떤 스킬보다 중요한 삶의 기술이라 믿는다.
아이들이 커가는 과정 속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고,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대단한 걸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저 밥 먹고 설거지하는 것, 빨래하고 정리해 옷장에 넣는 것, 쓰레기가 보이면 치우고 쓰레기통이 꽉 차면 비우는 것… 전혀 대단해 보이지 않지만 우리 삶 속에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태도를 말이다. 여기에 한가지를 더해보자면, 자기 손으로 만든 음식으로 다른 이들을 기꺼이 대접하며 사는 삶까지.
말도 안 되는 수학 점수를 받은 아이와 함께 연습문제를 풀고 크레페를 만들며, 배움과 돌봄, 나눔이 일상의 귀한 삶의 기술임을 다시 확인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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