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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오래전 블로그

Reflection on Jonah

Dec 25, 2016

요나서 성경 공부를 마치고…

5주간의 요나서 성경 공부를 은혜 안에 잘 마쳤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기대하고 상상했던 것 그 이상의 스토리가 그 안에 담겨 있음을 보고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내 마음을 두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 앞에서 으름장을 높으며, 하나님의 방법이 틀렸다고, 내가 맞다고 우기는 요나가 낯설지 않은 것은 요나를 통해 이스라엘도 보이고, 우리의 교회가 보이고, 또 내가 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 같이 떠들어 대지만 전혀 알지 못하는 우리가 보입니다.

요나서를 통해서 세리의 기도를 우습게 여겼던 바리새인을 봅니다. 탕자의 비유의 나오는 큰 형도 봅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정말 합당한 것이냐고 컴플레인 했던 하박국도 보입니다.

니느웨의 회개를 원하셨던 하나님, 그리고 누구보다도 요나가 꼭 그 마음을 전해주었으면 하는 하나님도 참 대단하시지요. 요나가 안 가기로 하면, ‘그래? 말 잘 듣는 다른 애 보내지 뭐…’ 하실 수도 있으셨을 텐데… 말입니다. 니느웨를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은, 요나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선원들의 רָעָה, 니느웨의 רָעָה가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께로 돌이켰을 때 해결되었듯이, 이제 요나의 רָעָה도 해결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왠지 우리에게도 소망이 있을 것 같습니다.

<짧은 히브리어 코너>

요나서에서 evil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רָעָה는 요나서에서 여러가지 다른 의미로 사용되면서 반복적으로 쓰였습니다. 니느웨의 악, 선원들이 겪는 재앙, 하나님께서 니느웨에게 내리시려고 했던 재앙, 등 이 모두가 רָעָה라는 단어로 표현됩니다. 모든 악(רָעָה)이 해결된 시점에서 4장 1절은 이것이(니느웨가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재앙을 철회하신 상황이) 요나에게 아주 큰 רָעָה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4장 6절에서 하나님께서 “to save him from his comfort (ESV)” 박넝쿨을 마련하시는데 discomfort로 번역된 단어도 רָעָה입니다. “save”라는 굉장히 신학적인 단어를 사용한 것을 보아서는 단순히 뜨거운 태양 빛에서 고생하는 요나를 구하기 위했다기보다는, 요나가 영적인 רָעָה의 상태에 빠진 것으로부터 deliver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보입니다. 공부하다 보니 넘나 재미나서 여기다 짧게 나눕니다. 잘난 체하는 거 아니에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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