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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오래전 블로그

로마서 16장을 읽으며

Feb 20, 2017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위치에 대해 생각하다

지난 주일 설교 본문이 로마서 16장이었다. 아직 한 번도 로마를 방문한 적이 없는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회에 쓴 편지의 마지막 부분이다. 본인이 직접 개척한 교회에 편지를 쓴 경우에는 (예를 들어, 에베소서, 빌립보서, etc.) 이렇게 긴 Greetings section이 없는데, 오히려 직접 만나보지 못 한 성도들에게 쓸 때는 정성을 들여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언급하며 인사글을 썼다.

설교 말씀을 듣는 중 나는 로마서 마지막 장에 언급된 여성들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특별히 앞부분에 등장하는 뵈뵈와 브리스가. 뵈뵈는 로마에 있는 교회에 바울이 쓴 편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감당했고, 브리스가는 늘 남편과 함께 언급되는데 사도행전이나 디모데후서와 같은 다른 성경책에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M.Div 과정을 할 때만 해도 난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위치에 대해서 큰 관심이 없었다.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리더십을 encourage하지 않는 학교의 분위기에 눌려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사역에 대한 term paper를 쓴 적도 있지만, 난 최대한 중도의 입장을 지키려 했었고 학교가 가르치는 관점 이상은 넘어서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실제로 내가 교회에서 어떠한 섬김을 할 때 나의 여성성이 어떠한 제한을 준다는 느낌을 심각하게 받은 적이 없어서 이 이슈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의 여성 리더쉽에 대한 커다란 벽은 아이러니하게도 선교 현장에 나왔을 때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 한국인 선교사 커뮤니티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나라 선교사들 안에서도 동일했다. 갑자기 나의 정체성에 대해 거부당한 것만 같은 느낌.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이거 뭐지?

결국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위치에 대한 고민은 나에게는 reality 그 자체가 되고 말았다.

(갑자기 전혀 다른 얘기일 수도 있지만)그러던 중 최근 들어Logos 프로그램에서 한글 버전이 출시되면서 이 패키지 안에 이재철 목사님의 로마서 강해서 책이 포함된 것을 알게 되었다. 다짜고짜 로마서 16장을 찾아서 읽어보았다.

똑같은 성경책을 읽어도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위치에 대한 해석의 다양성이 존재하고 전혀 반대의 해석을 내놓는 경우가 너무도 많은데 이러한 이슈에 대한 한국 목회자의 글을 읽는 것 자체가 흥미로웠고 신기했다. (그래서 이곳에도 옮겨본다.)

교회 안에서, 그리고 또 선교사 커뮤니티 안에서 느끼는 답답함이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글을 읽으니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인다.

from 이재철 목사의 로마서 3

1절부터 16절까지를 보면, 로마에서 지내고 있거나 로마에 가게 될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총 스물일곱 명입니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뵈뵈라는 여인이 나옵니다. 뵈뵈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쓰고 있는 이 로마서를 들고 로마 교회에 간 인물입니다. 그곳에서 바울이 올 때까지 로마 교회 교인들과 신앙생활을 함께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통신수단이 없었으므로, 편지를 쓰면 사람이 직접 가지고서 전하러 가야 했습니다. 중요한 편지일수록 책임질 만한 사람이 들고 갔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로마서를 주저 없이 뵈뵈라는 여인에게 맡긴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의 이름을 16장에서 가장 먼저 기록했습니다. 스물일곱 명 가운데 아홉 명이 여자인데, 한 가지 더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3절)
바울이 자신의 동역자인 브리스가와 아굴라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들은 부부 사이입니다. 요즘도 부부를 누군가에게 소개할 때, 대개 남자를 먼저 언급합니다. 더욱이 2천 년 전에는 두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자의 이름을 먼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2천 년 전 로마 교회에는 성차별이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여성들은 차별 대우를 받아 왔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34절에서 바울이 전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는 구절을 교회가 끊임없이 인용하면서 여자들을 차별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 분란이 있었는데, 거기에 관련된 몇몇 여인들에게 그런 일이 없도록 하라는 뜻으로 전한 말입니다. 이 구절을 여자는 교회에서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하면, 베드로를 사탄이라 해석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신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남자 혼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없고, 여자 혼자서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고 부부를 이룹니다. 그리고 함께 살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자의 신앙으로 행해지는 봉사와 남자의 신앙으로 행해지는 봉사가 어우러지면서,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아름답게 회복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당시 차별 대우를 받던 여성들을 왜 높이고 존중하고 있습니까? 교회는 신앙 공동체이고, 신앙에 관한 한 남자보다 여자가 더욱 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실 때 그 현장에 끝까지 있던 사람은 여자들입니다. 부활하시기 직전 무덤에 갔던 사람도 여자고, 예수님께 300 데나리온의 값비싼 옥합을 깨뜨린 사람도 여자입니다. 그때 제자들이 그 여인에게 왜 비싼 것을 허비하느냐며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 여인을 칭찬하셨습니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막 14:9)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칭찬하신 이유는, 그 여인이 주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자신이 죽게 될 거라 여러 번 말씀하셨는데,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제자들도 그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사람이 죽으면 시체에 향유를 바르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께서 죽는다고 하시니까 그분의 죽음을 미리 예비하기 위해 주님을 찾아와 향유를 부은 것이었습니다. 향유의 가치가 300 데나리온이나 되어서가 아니라, 아무도 믿지 않는 상황임에도 믿었기 때문에 그 여인이 영원히 높임 받게 된 것입니다.
금년에 우리 교단에서 여성 목사와 여성 장로가 세워질 수 있게 헌법을 바꾼 것은 참 잘된 일입니다. 가정에서도, 일터에서도 성차별은 철폐되어야 합니다. 남성은 남성대로, 여성은 여성대로 각자 할 수 있는 능력과 맡겨진 역할을 존중할 때,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하게 회복됨을 잊지 마십시다.
이재철. (2015). 이재철 목사의 로마서 3 — 사랑의 빚 (로마서 12–16장) (초판, pp. 323–327). 04084 서울시 마포구 양화진 4길 3: 주식회사 홍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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