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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al reflections & scribbles

다말 (창 38장)

The painting titled “Judah and Tamar” attributed to the School of Rembrandt


유다와 다말 이야기는 요셉의 서사 중간에 뜬금없이 등장한다. 참으로 랜덤하다. 그 위치 자체가 참 독특하다. 문학적 장치로서의 이 이야기를 논할 수 있겠지만, 오늘은 다말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싶다.

다말은 남편과 사별하고, 그 당시 문화였던 levirate marriage(형사취수혼)의 전통을 따라 두 번째 남편을 얻었지만, 그마저도 죽고 말았다. 시댁(유다)의 결정에 따라 과부가 된 그녀는 친정으로 돌려보내진다. 이 얼마나 기구한 운명인가.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남편 잡아 먹는 x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손가락질 했을지도 모른다.

고대 중동의 결혼 풍습을 보면, 신부 쪽에서 신랑에게 bride price를 지불하고 여자가 남편 집으로 가는 구조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다말이 친정으로 보내진 건 마치 하자가 있는 물건을 돌려보내는 것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당시는 여성을 소유물로 여기도 했으니…) 친정은 자기의 할바를 다 했기에 딸을 돌봐야 할 법적 책임은 없었지만, '딸 가진 죄인'이라는 마음으로 그녀를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과부가 된 다말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아무런 힘이 없었다. 고대 시대의 여성의 삶의 자리는 그러했다. 보호받을 곳도, 스스로를 지킬 힘도 없었던 그녀는 마지막 결단을 내리게 된다. 그래, 이제는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어.

얼굴을 가리고 유다를 기다리는 다말의 선택은 그 당시 여성이 생존을 위해 할 수 있는 최후의 전략이었을 것이다. 다말의 행동은 단순한 절망이 아니라 자기 삶을 지키기 위한 주체적인 선택이었다. 이제 이 이야기는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이끌어간 모습으로 새롭게 읽힌다.

결과적으로, 다말의 이름은 룻기서 4장에 나오는 다윗의 족보와 마태복음 1장의 예수의 족보에 등장하게 된다. 유다의 자손을 이어가고, 그 자손에서 메시아가 오기까지 다말의 이름은 그렇게 역사의 한 부분으로 기록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설교 속에서 다말은 조연으로 다뤄진다. 반면, 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듯한 말을 남겼을 뿐인데 (그것도 의미가 분명하지 않은데…), 여전히 이 서사의 주인공으로 그려진다. 왜 그럴까? 유다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 때문일까?

다말은 충분히 주목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다.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킨 사람이다. 이제 다말의 이야기를 다시 읽을 때, 그녀를 그저 피해자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주도해 나간 여성으로 기억해야겠다. 다말의 이름은 유다의 족보뿐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 속에 영원히 남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