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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오래전 블로그

냉장고를 부탁해

Jun 3, 2015

 

그런 날이 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피곤함이 느껴지는 그런 날. 오늘이 딱 그런 날이었다. 아이들은 평상시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 티격태격 다투고, 아이들을 봐주던 남편도 짜증이 나서 아침부터 소리가 커지는... 오늘이 딱 그런 날이었다.

 

이런 날에는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찐한 커피를 내려서 아이스 동동 띄워 정신이 번쩍 들게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며 시작해야 한다. 나의 영육, 그리고 정신 건강을 위해 말이다.

 

냉장고를 열었다. 느낌이 좀 이상하다. 평상시와 많이 다르다. 음.. 뭐지? 아직 잠이 덜 깼는지 감이 오지 않는다. 아이스 트레이를 끄집어낸다. 출렁출렁~~ 헛! 물이 담겨있다. 악~~~ 이거 뭐지? 왜 이게 다 물이지? 고기도, 시푸드도, 야채도, 과일도 다 녹아있다. 도대체 밤 사이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이 냉장고는 다바오 와서 처음 구입한 냉장고다. 아직 1년 하고도 8개월이 안 된 냉장고다. 잦은 정전으로 인해 전자 제품의 수명이 비교적 짧은 이 곳이지만 이렇게 빨리 문제가 생길 줄은 몰랐다. 나름 열심히 관리했다고 생각했는데...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전자 제품 관련해서는 난 거의 useless 하다.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본다. 물건을 구입한 곳에 AS를 요청했다. 당장 못 온단다. 빨라야 내일이란다. 아~~ 안 됨!!! 이 안에는 소중한 우유가 들어있다. 이들을 구해야 한다. 우유는 이 나라에서 몸값이 비싼 녀석들이다. 아.. 어쩌지.

 

어찌어찌해서 가전제품을 고치시는 일을 하시는 교회분에게 연락이 닿았다. 길을 헤매셔서 생각보다 늦게 오셨다. 그래도 괜찮다. 오늘 당장 냉장고를 봐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냉장고 뚜껑을 여시 더니 컨트롤 패널(?)을 고치신다. 그게 나가면 센서도 나갔을 가능성이 있다고 그것도 보신다. 역시나 나갔다. 그것도 임기응변으로 고치신다. 다시 냉장고를 돌린다. 안 시원해진다. 느낌이 안 좋다. 다시 한번 뭘 뜯어보시더니 가스가 세는 것 같다고 하신다.

 

쉽게 고쳐지려나 했으나 일이 커지고야 말았다. 오늘은 시간도 늦고 장비도 없어 개스 관련해서는 고칠 수가 없었다. 내일 바로 고칠 수 있으려나 희망을 걸었는데 내일 예약이 있으시단다. 그러면 그다음 날? 아.. 이런.. 그날은 오전부터 4시간 동안 정전이 되는 날이다. 용접을 하려면 전기가 필요하시단다. 아...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어쨌든 연락하기로 하고 우선 보내드렸다.

 

이제 남은 과제는 이 음식들을 어떻게 세이브할 것이냐에 있다. 아는 분들 집에 여기저기 맡길까? 아니지, 너무 큰 민폐지. 여기 냉장고 다 자그마한데. 그럼 어쩌지? 우유라도 살려보자. 우유는 남편 오피스 냉장고로 긴급 대피를 시킨다.

 

이때 마치 성령님의 illumination과 같이 떠오르는 생각. 아 맞다! 우리 옆집 선교사님 엊그제 안식년 떠나셨지? 그 집 냉장고 비어있을 텐데. 어쩌면 아직 켜있을지도 모른다. 부리나케 그 집 열쇠를 맞고 계신 또 다른 선교사님께 연락을 드렸다. 이런 응급 상황에는 안식년 떠나신 선교사님도 이해하실 거라며 열쇠를 갖다 주신다고 하신다. 휴우~~ 많은 음식을 세이브할 수 있게 되었다.

 

계획에도 없던 냉장고 정리에 들어갔다. 이 참에 버릴 것은 버리고 어떤 재료들은 바로 저녁 메뉴로 먹어치웠다. 냉장고 정리하는 방법도 가지가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냉장고 안의 물건들이 점점 빠져나가고 깨끗한 냉장고를 보니... 어, 이거 뭐지? 왠지 기분이 좋다? ㅎㅎㅎ 실성 모드인가? 그런데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남편도 기분이 좋단다.

 

우리가 소유한 물건의 무게만큼이나 삶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선교지에서는 정말 자주 느끼는 감정이다. 만감이 교차한다. 한 날에 족한 만나만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진다. 광야의 삶에서 내일, 모레, 또 그다음 날에 먹을 음식까지 짊어지고 살아야 했다면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해가 지고 무지막지한 소낙비가 한차례 쏟아붓는 동안 옆 집 냉장고로 우리들의 음식을 대피시켰다. 가볍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당장 내일부터 냉장고를 고칠 때까지 매 끼니를 남기지 않고 한 번에 다 먹을 만큼만, 딱 그렇게 적당히 준비해야 한다. 굳이 또 남는다면야 옆집에 갖다 놓으면 되지만.. 귀찮다. ㅋㅋㅋ 아 그러고 보니 재료도 왔다 갔다 들고 올 수 없으니 간단하게 먹어야 할 듯하다. 1식 one반찬으로다가.

 

냉장고 가스 새면 고치기 정말 힘들고 돈만 많이 먹는다는데... 아휴.. 고민이다. 주님, 냉장고를 고쳐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