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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오래전 블로그

He cares for us? 하나님의 본심 알아드리기.

Sep 17, 2017

  • 금요일 오전마다 함께 모여 성경을 읽는 그룹을 섬기고 있다. 이번 학기는 에스겔서를 읽고 있다. 예루살렘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표현이 너무도 적나라하고 민망하여 낯 뜨거울 정도다 (겔 16장). 관계가 이 정도로 망가졌다면, 회복은 불가능하다 싶다.
  • 그런데, 아… 이게 뭔가. 그런 예루살렘이라도, “너희가 지은 죄를 모두 너희 자신에게서 떨쳐내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왜 죽고자 하느냐? 죽을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그가 죽는 것을 나는 절대로 기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희는 회개하고 살아라 (겔 18:31-32)”라고 말씀하시는 주님! 이 말씀에 마음이 무너진다.
  • 하나님의 심판이 심판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음을 선지서를 대할 때마다 더 뼈저리게 느낀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라는 요한복음 3장 17절의 말씀은 진리다. 그분의 목적은 심판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가 아무리 죽을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죽는 것을 절대로 기뻐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본심을 얼마나 많이 왜곡하고 오해하는가.
  • 에스겔서를 읽고 난 후 토론 시간을 갖는다.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신다. 나름 내 수준에서 그분이 하신 말씀을 정리해보자면 이렇다.”다른 종교와 비교했을 때, 기독교는 어떻게 다른가. 우리의 신은 우리를 마냥 품으시고 보호만 하시는 분이 아닌 것 같다. 타 종교는 불운, 악한 일을 막기 위한 장치가 많은데 (예를 들어, 점을 봐서 다가올 일을 대비한다든지, 선행을 통해 포인트를 쌓는다든지, 부적으로 액운을 막는다든지… 실상은 굳이 신이 필요 없는 구조), 우리의 신앙은 뭐가 다른지.”
  • 우리의 신앙은 “관계”라는 것과 그 중심에 supreme ethic으로 “사랑”이 있다는 것이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보호와 돌봄 안에서의 “관계”의 개념을 생각하다보니 “관계의 성숙”, 다른 말로는 관계의 deepening… 그러니까 깊어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그 완벽한 사랑의 관계 속으로의 초청.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기독교의 기초가 아닐까?
  • 그런데 어떻게 해야 관계가 깊어질 수 있는 것인지… 그걸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말씀 열심히 읽고, 기도 열심히 하면 되는 것인가? 마치 무슨 주술을 걸듯이, 아니면 어떠한 독한 훈련을 통해 관계가 깊어진다고 하면, 난 그건 make sense 하지 않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은 그냥 기계적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 내가 넘어져 있을 때, 더 잘 하라고 (어찌 보면 좀 모질게?) 밀어붙이는 것 같지만, 그 안에 담긴 그분의 본심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겪고 있는 개인적인 어려움의 시간에 대해 reflect 하게 되는데… 하나님과의 관계의 성장과 성숙에는 반드시 이런 시간들이 동반된다는 것이 나의 짧은 경험에서 나온 결론이다. 그렇다면 관계의 성숙은 고난의 시간 없이는 불가능한 것?
  • “젖 뗀 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 있듯이 (시편 131편)” 신뢰 가운데 자라야 하는 부분이 있으며, 말들과 함께 경주할 만큼 (렘 12:5) 힘든 일도 감당할 만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데… 이게 말이 쉽지. stretch 되는 시간은 누구에나 힘들기 마련. 그런데 그냥 얼렁뚱땅 휙~ 지나가버리면 나에게 강력하게 각인된 것이 없더라는 것이다. 아… 이 무슨 전혀 반갑지 않은 딜레마인지.
  • 이런 고민을 하던 중에 페친이신 김한원 목사님의 <개의치 않으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의 포스팅을 읽게 되었다. 
  • 이 포스팅이 내게 주는 의미가 컸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헬라어 word study까지 하게 만들었다. μέλει라는 동사의 의미 중에 care라는 의미로 사용된 몇 가지 구절들을 더 찾아봤다. 예수님에게 사용되지 않았을 때의 context는 요한복음에서도 두 차례 등장했다.
    •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0:13)“
    •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가 아니다. 그는 도둑이어서 돈자루를 맡아 가지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것을 훔쳐내곤 하였기 때문이다." – 가룟 유다에 대한 설명 (요한복음 12:6)
  • 양들의 참 목자가 아닌 삯꾼이나 가룟 유다야 말로 정말 신경 쓰지 않고 care하지 않는 case의 전형이 아닌가. 그런데 예수님도…? 그럼 우린 정말 망한 거다. 망해도 보통 망한 게 아니다.
  •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는 중에 풍랑을 만난 제자들은 거센 바람이 일어나서, 파도가 배 안으로 덮쳐 들어와 배에 가득 차게 되었을 때,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께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Teacher, do you not care that we are perishing)?”라고 말했다. [*perishing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stand out 한다. 우리가 무슨 일을 겪을 때마다 그런 느낌이 드니까. 아.. 정말 죽을 것 같아… 이런 느낌.]
  • 우리는 당장 죽기 일보 직전의 상황에 처해있는데 우리의 상황에 대해 care 하시지 않는 것 같은 무관심한 하나님. 우리는 이런 주님께 왜 우리를 돌봐주지 않느냐고 호소한다. 그분은 정말 이런 하찮은 인간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신 건가?
  • 엄청난 풍랑이 일고 죽을 만큼의 공포에 시달렸던 그 현장에 함께 있었던 베드로는 훗날 핍박으로 흩어져서 사는 나그네들에게 쓴 편지에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의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μέλει)”
    “casting all your anxieties on him, because he cares(μέλει) for you.” (벧전 5:7)

    이 구절에 μέλει라는 동사가 등장하는 것은 그냥 우연의 일치일까?

  •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는냐?”라고 말씀하셨던 그때의 예수님을 떠올렸을지 모르겠다. [말씀으로 풍랑을 잠잠케 하신 후에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 풍랑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을 보고는 제자들은 더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말이다.”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하는가?” (막 4:41) 방금 전까지 그들을 죽음의 공포로 몰아갔던 풍랑은 이제 그들의 기억에는 사라진 지 오래고, 그 풍랑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의 능력에 어안이 벙벙해진 제자들의 모습이다. 인생의 폭풍 후에 예수님의 주 되심만 남았으면 좋겠는데.. 그 예수님이 아직 나와 무관한 분이시면 그냥 큰 두려움만 남게 되는 것인 듯.
  • 그분의 우리를 향한 생각은 우리의 것과는 참 다르다. 달라도 참 다르다.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는가 싶을 정도로 다르다. 심판 중에도 우리가 회개하고 죽지 않기를 바라시는 하나님, 죽을 것만 같은 삶의 무게가 우리를 누르고 공포를 줄 때, 믿음으로 그분을 바라보라고 하시는 것 같다. 그분께서 우리의 믿음을 완성케 하실 테니 (히 12:2).
  • 나 몰라라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분의 본심을 오해하지 말기를, 그분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그분은 그렇게 지금도 바라시는 것일지 모르겠다. 그분의 사랑을 알아주기를 말이다.
  • 자녀를 키우다 보면 아이가 실수하더라도 제대로 배우기를 인내로 기다려야 할 때가 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기에, 그 실수를 반복적으로 보더라도 아이가 균형 있게 잘 성장할 수 있도록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그때 그 아이가 나보고 왜 도와주지 않냐고 쌩 난리를 부리면 억울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왜냐면, 분명 그 시작에 그 아이는 스스로 하길 원했었기 때문이다.
  • 주님 주신 믿음으로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 주시는 하나님 생각을 하면서 아.. 내가 또 이렇게 stretch 되는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현실은 그것을 보지 못 할 때가 많다. 왜? 난 여전히 많이 부족하고 미숙하기에… 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을…
  • He cares for you!!!!!!!!!!!!!!
  • 랜덤 한 글쓰기
<개의치 않으시는 예수님>

대부분 내가 넘어지면 다칠세라, 그리고 내가 괴로워하면 더 괴로워하시는 그런 주님의 모습만 생각한다. 헬라어에

“οὐ μέλει σοι”라는 표현이 있다. 신경 쓰지 않는다, 개의치 않는다는 의미다. 총 네 번 사용되었는데, 모두 예수님께만 썼다.

살짝 비꼬면서 예수님을 올무에 들게 하려고 할 때(마 22:16, 막 12:14) 배에 물이 들어와 죽게 생겼는데 돌보지 않냐고 할 때(막 4:38) 일하지 않는 마리아를 신경 쓰지 않으시느냐 물어볼 때(눅 10:40) 믿음이란

무엇일까? 모든 걸 내가 원하는 대로 작은 부분까지 돌보시기를 기대하는 것만이 좋은 믿음일까?

정말 그분을 믿는다면, 개의치 않으시는 우리 주님을 개의치 않고, 그래도 한걸음 풍랑을 가로질러 항해를 해나가는 것이, 필요한 믿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별로 신경 쓰시지 않으시는 듯한 주님을 만날 때, 너무 놀라지 말자.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다는 그분의 가장 큰 격려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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