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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오래전 블로그

"The Twelve" 12 소선지서 (2)

Dec 2, 2017

"The Twelve" 12 소선지서 (1) 편 글이 다소 급하게 쓰인 느낌이 있어서 빨리 보강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읽으면서, 나누면서(함께 읽는 사람들과) 깨달았던 부분들이 많았는데, 잊어버리기 전에 빨리 적어두자는 생각에 순식간에 적어 내려간 글이라 확실히 디테일이 떨어진다(그런데, 일반적으로 난 디테일에서 떨어진다).

이번 모임에서는 요엘서 1장에서 아모스 1장까지 진도가 나갔었다. 이 날은 참석 인원이 적어서 진도를 너무 나가면 안 될 것 같아서 요엘서만 읽을까 하다가, 다음 책으로 넘어가면 어떤 느낌이 들까 궁금해서 딱 아모스 1장까지만 추가로 읽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읽은 내용에서 발견한 몇 가지 흥미로운 점들을 정리해본다.

  1. 호세아서의 독특한 ending은 이렇다. "지혜로운 사람은 여기에 쓴 것을 깨달아라. 총명한 사람은 이것을 마음에 새겨라. 주님의 길은 올바르다. 의로운 백성은 그 길을 따라 살아가지만 죄인은 비틀거리며 넘어질 것이다." (14:9) 일반적으로 다른 선지서의 ending과는 확실히 다르다.
  2. 호세아서 다음으로 오는 요엘서의 시작은 이렇다. "이것은 주님께서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하신 말씀이다. 나이 많은 사람들아, 들어라! 유다 땅에 사는 사람들아, 모두 귀를 기울여라! 너희가 살고 있는 지금이나 너희 조상이 살던 지난 날에, 이런 일이 일어난 적이 있느냐? 너희는 이것을 자녀들에게 말하고, 자녀들은 또 그들의 자녀들에게 말하게 하고, 그들은 또 그다음 세대에 말하게 하여라." (1:1-3)
    • 요엘이 누구의 아들인지에 대한 정보를 준다.
    • 어떠한 시대에 활동했는지에 대한 정보는 주지 않는다.
    • "너희는 이것을 자녀들에게 말하고, 자녀들은 또 그들의 자녀들에게 말하게 하고..."라는 식의 말은 지혜서에서 많이 등장하는데, 선지서인 요엘서에서는 왜?
    • 요엘서의 문학적인 장르는 무엇인가?
    • 호세아서의 마지막과 요엘서의 처음은 "지혜서"가 가질 수 있는 특징으로 잘 엮여져 있다.
    • 12 소선지서 안의 각각의 책들이 어떻게 엮여있는지 (엮여있을지...) 슬슬 감이 온다.
  3. 요엘이 어떠한 시대에 활동했는지에 대한 정보를 주지 않는 것. 이것과 그 앞전의 글인 호세아서의 시대적 배경을 연결시켜서 생각해도 될까? 연속선상에서? 꼭 같은 시대라기보다는 어떤 시대적인 정신에서? 그들의 죄의 양상?
  4. 호세아서의 회개(6장)는 거짓이었다. 그들의 영혼 없는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히, 헤세드)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셨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그들의 신학이 그들의 삶과 분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무지"의 수준에 가깝다고 본다)
    •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마태복음에서 두 번이나 인용하셨다.
      •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9:13)
      •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았더라면, 너희가 죄 없는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 12:7)
      • 두 context 모두 바리새인들의 긍휼히 없는 신학(그마저 잘못된 해석)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 안타까워 하심(?)
    • 헤세드의 삶을 산다는 것은 어떠한 삶을 의미하는 것일까?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헤세드, 우리가 살아야 하는 헤세드?
    • 헤세드의 삶 = 하나님 아는 것???
  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끝까지 진정한 회개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호세아서의 마지막 장의 이스라엘을 향한 호소는 정말 처절하다. 어떻게 돌이켜야 하고,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까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신다. 하나님 입장에서 엄청 자존심 상한다.
    • "이스라엘아, 주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오너라. 네가 지은 죄가 너를 걸어 거꾸러뜨렸지만, 너희는 말씀을 받들고 주님께로 돌아와서 이렇게 아뢰어라.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우리를 자비롭게 받아 주십시오. 수송아지를 드리는 대신에 우리가 입술을 열어 주님을 찬양하겠습니다..."
    • 그럼에도 그들이 회개했다는 말은 없다.
  6. 요엘서로 넘어가면 확실히 보인다. 거룩한 금식을 선포하고, 성회를 열어, 모두 모여 주님께 부르짖으라는 말이 얼마나 자주 반복되는지. 호세아서에서 시작된 회개의 촉구는 여전히 ongoing!
    • “지금이라도 너희는 진심으로 회개하여라. 나 주가 말한다. 금식하고 통곡하고 슬퍼하면서, 나에게로 돌아오너라.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의 하나님께로 돌아오너라. 주님께서는 은혜롭고 자비 로우시며, 오래 참으시며, 한결같은 사랑을 늘 베푸시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많으셔서, 뜻을 돌이켜 재앙을 거두기도 하신다. (요엘 2:12-13)
    • 이래도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 나중에 몇 권 후에 등장하는 요나서를 읽을 때, 우상을 섬기는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단 몇 마디 말에 동물까지 금식하며 회개하는 것을 보면서 이스라엘과 극적인 대조를 이루는 것을 볼 것이다. 풍자의 최고조.

시간이 너무 늦어서 여기까지만 써본다. 자야지. 결국 쓰려던 거 다 못 썼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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