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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오래전 블로그

남편은 출장 중

Sep 27, 2018

남편이 워크숍 참석 차 태국 치앙마이로 떠난 지 13일째 되는 날이다. 오늘의 분주한 스케줄을 소화하다가,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진짜 너무 열심히 사는 거 아닌가?'

아침 일찍 일어나 두 녀석의 아침을 챙겨주고, 학교에서 먹을 간식 챙겨주고, 큰 애 먼저 학교에 데려다주고, 그다음에 바로 작은 애 학교에 데려다준다. 학교를 오가는 길은 chaos 그 자체인데, 아주 오래전에 사촌 오빠를 따라(정확히는 없어진 오빠를 찾아서) 가 본 오락실에서 보았던 레이스카(모토사이클이었나?) 게임이 떠오르게 한다.

게임용 차는 빠르게 달리고, 그 옆으로는 닭이 날아다니고, 소나 염소도 길을 건너고, 역주행하는 오토바이들과 느리게 가는 트라이 바이크, 쌩쌩 달리는 트럭, 그 사이에서 무단 행단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모든 움직임 속에서 무조건 돌진하는 게임용 차.

매일 아침 아이들 등굣길에서 그 게임이 장면들이 떠오르다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거 완전 현실이었네.'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게임에서는 몇 개의 라이프가 있으니 사고가 나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점만 다를 뿐.

어떠한 장애물이 있어도 매일 아침 아이들을 등교시키기 위해서 무조건 직진하는 나. 360도 눈이 있어 주변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일일이 다 확인하며 가는 길. 애들 등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벌써 하루를 다 산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오늘 같은 날은 J의 도시락을 학교 등교길에 챙겨주지 못해서, 다시 집으로 돌아와 도시락을 싸고, 그걸 챙겨 들고 사무실로 출근했었다. 오전에 맡은 일이 있었다. informal 하게 exegesis에 대한 간단한 개요를 했어야 했는데, 이미 피곤한 상태로 간 거라 죽 쒔다고 봐야 할 듯.

미팅을 마치고는 사무실 옆에 붙어 있는 J의 학교에 가서 도시락을 도시락 드롭 오프 테이블에 가져다 두고는, 바로 미국의 코스코와 같은 홀세일 매장으로 갔다. 오늘 엄청난 세일이 있다고 해서. 이런 날은 절대로 가면 안 되는 날인데 정말 필요한 물건들이 세일을 많이 한다고 해서 한 푼이라도 아껴보고자 갔다. 주차장에 들어가기 전부터 이미 차가 밀려 있다. 아... 차를 되돌릴 수도 없다. 완전 스턱.

힘들게 힘들게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와 한 카트 가득 산 것들을 순식간에 정리하고 너무 배가 고파서 평소 좋아하지도 않고 먹어서도 안 되는(소화불량의 원인) 라면을 먹는다. 맛없다. 라면은 남편이 끓여줘야 맛있는데. 정말 맛이 없었다. 난 그냥 라면은 맛있게 못 끓이는 걸로.

라면을 먹자마자 저녁에 애들 먹일 불고기를 재워두고, A가 주문한 치킨 수프 재료를 준비한다. 자식이 무섭긴 무서운가 보다. 해달라고 또 해준다. 아, 그런데 이 와중에 A의 유치원 선생님이 문자를 보내셨다. 내일 행사에서 A가 읽을 시를 문자로 보내달라고. 그렇다. 이 바쁜 나날 속에 ㅁ가 다니는 학교는 행사를 밥 먹듯이 한다. 그리고 이런 행사들은 반드시 부모 참여가 요구된다.

오늘은 아침에 내린 커피도 못 마시고 하루 종일 들고만 다녔다. 멍한 상태로 반나절 이상이 갔다는 얘기. 한 숨 돌려볼까 했더니 이젠 애들 픽업할 시간이다. 픽업 순서는 A 먼저, 그다음에 J. 그 험한(?) 길을 또 가야 하네.

그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평소 초저질 체력을 자랑하는 내가 어디서 힘이 나서 이렇게 하고 있지? 두 가지를 생각해봤다. 첫 번째로는 내게는 안 할 수 있는 옵션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그냥 다 내가 해야 되는 일이다. 다른 옵션은 없다. 두 번째는, 남편은 큰일이 없는 한 약속한 기한 내에 돌아온다는 것. 돌아오면 이 load는 나눌 수 있다는 거 (아니면, 그냥 다 넘기고 난 휴식~~~ ㅎㅎㅎ). 바로 그 사실이다. 그래서 하게 된다. 없던 힘도 끌어올린다. 왜냐? 남편은 돌아오니까. 그때까지만 전력 질주하면 되니까.

그러면서 갑자기 말도 안 되는, 조금은 억지스러운 커넥션을 만들어 보았다.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들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주님이 금방 다시 오신다고 했었으니까... 열심히. 최선을 다해. 전력질주.

누군가가 돌아와서 나를 구해줄 것이라는 약속은 없던 힘도 솟아나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지금을 견딜 수 있는 힘. 힘을 적당히 안배할 필요도 없는 거고 그냥 맡겨진 사명에 온 몸을 불사르는... 이런 것이 소망에 관한 것일까? 이거 valild 한 적용인가? ㅎㅎㅎ

어쨌든, 그럼에도 우리 남편은 예수님은 아님으로... 더 치열할 주말을 위해 난 내 힘을 안배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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